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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의 감상

잔혹함에 대한 호기심 - 제노사이드, 다카노가즈아키 장편소설

 

 

 

  내 짱구에도 한계가 왔다. 머리 용량에 맞지 않는 책을 읽으려다 보니 책에 거부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다시금 책에 관심을 불어 넣어 줄 수 있는 재미있는 소설책을 찾아보았다. 그러다가 발견한 소설이 <제노사이드>이다. 블로그 여기저기서 리뷰가 올라오는 걸 보니 정말 하긴 한가보다.

 

 

  이 소설을 다 보고 느낀 점? 블록버스터 영화를 한 편 본 느낌이다. 스케일이 장난이 아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점, 정말 재밌다! 덕분에 책에 대한 관심이 다시 급상승했다. 내가 여기서 줄거리를 말하면, 또 중요한 장면을 말하면 읽는 분들이 김빠지실 테니 그런 어리석은 행동, 욕먹을 행동은 하지 않겠다[영화 볼 때 결말 알고 보면 김빠지듯이]. 다만 그냥 닥치고(!) 보라고 권하고 싶다. 날도 무더워 죽겠는데 에어컨 바람 쐬면서 몰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이 책에서 나는 아주 다양한 분야를 간접 경험할 수 있었다. 제약을 포함한 여러 과학 분야, 아프리카 내전[이건 정말 지옥이더군], 용병, 국가의 수뇌부[더 정확히 말하자면 백악관의 수뇌부], 비행 그리고 인간의 본성[전쟁이 존재하는 이유, 인간의 잔혹성, 인간의 한계] . 이해하지 못하는 말과 이해할 수 없는 논리가 여럿 있었지만, 그런 건 이야기를 이해하고 즐기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가 영화에 나오는 전문 용어나, 기술 따위를 이해하지 못해도 영화를 즐기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생각할 거리라고 말하기는 민망하지만 그래도 내게 생각의 실마리를 제공해줬던 한 부분을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겠다.

  

 

  

  만약 이곳에 기자가 있었다면 학살 현장을 문장으로 적고 있으리라. 그 기사가 읽는 사람의 마음에 평화에 대한 소망을 싹트게 함과 동시에 공포스러운 것을 보고 싶은 엽기적인 취향을 부추긴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리고 저열한 오락의 발신자와 수신자는 학살자들과 똑같은 생물 종이면서도 자기만은 다르다고 생각하고, 입으로만 세계 평화를 부르짖으며 만족을 느낄 터였다.

(제노사이드 - 376pg)

 

 

 

  예전에 대한민국 선교사가 이라크 무장집단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 때 전 국민이 슬퍼하며 죽어간 그분에게 애도의 뜻을 표했다. 당연히 언론에서도 너나 할 것 없이 앞 다투어 그분에 대한 기사를 헤드라인으로 장식했다. 그때 대한민국의 이라크에 대한 적대심은 정말 대단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애도의 마음, 적대심과는 다르게] 많은 이들이 선교사가 죽어가는 장면을 촬영한 문제의 동영상을 보려고 했었다. 포털의 연관 검색어로 동영상이 떡하니 뜨기도 하고 많은 블로거가 이 동영상을 자신의 블로그에 링크해 놨었다. 내가 중학생(!)이던 그 때도 반 아이들끼리 이 영상을 돌려보곤 했었다. 정말 잔인했던 그 영상을 말이다. 겉으로는 애도의 뜻을 보이면서 정작 잔인한 장면을 돌려보는 우리의 이중적인 모습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인간에게 동물로서의 잔인함은 존재한다. 대다수의 사람이 전쟁이 없고, 내전이 없고, 생존의 위협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에 살고 있기에 그 잔혹성이 발현되지 않을 뿐이다. 허나 생존이 걸린 비상사태라면 우리 인간들, 정말 어떻게 변할지 알 수가 없다. 일례로 우리나라가 일제의 속국으로 전락했던 일제 강점기에 우리의 선조는 독립을 위해 일본을 무차별 공격했다[우리에게는 의거이겠지만, 일본 입장에서는 자국민이 죽어나간 테러였다]. 6.25전쟁 때는 안 그랬나? 서로가 살기 위해 서로 죽이는 잔혹한 일이 무려 3년 동안 발생했다. 그때의 사상자만 수십만이다. 분명히 우리 인간은 생존 앞에서는 잔혹해진다. 그리고 그건 본성이다.

 

 

  그렇다면 잔인함에 대한 호기심. 잔인한 동영상을 들춰보게 하는 이 호기심은 우리의 잔혹한 본성이[분출되지 못한 채] 호기심으로 변질되어 나타난 건 아닐까? 이 호기심을 아는 언론은 이목을 끄는 자극적인 기사를 쓰고, 거기에 호기심을 느끼는 여러 사람은 동영상을 찾아보고 자신의 상황에 안도한다. 그러면서 생각하겠지. ‘나는 이런 무장집단하고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다. 얘들은 정말 인간도 아니다.’ 학살자와 같은 인간 종이면서 자기만 고상한 척한다는 작가의 말이 꽤나 설득력 있게 느껴진다.

 

 

  이 책 분량이 엄청나다. 거의 700pg에 육박한다. 나는 책을 읽는 속도가 좀 느린 편이라 일주일이 넘게 걸렸다. 다만 재미가 없어서 1주일이 걸린 게 아니라, 요즘 바빠서 완전하게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기에 그 정도 걸렸다. 그래도 1주일이란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투자한 만큼의 재미와 여운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제 <제노사이드>를 시작으로 <숙명>, <,>,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사랑의 기초>,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소송 사냥꾼> 등의 쟁쟁한 소설들을 읽을 예정이다. 그리고 이 책들은 지금 다 내 수중에 있다. 이거 자랑이다. 당분간 소설의 세계에 푹 빠질 수 있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