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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의 감상

비슷한 사람, 비슷한 사랑 -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알랭 드 보통

 

 


  카피라이터 ‘박웅현씨의 책, <책은 도끼다>에는 알랭 드 보통에 대한 찬사로 가득합니다알랭 드 보통이야말로 미친 사람이다.’ 라며 극찬에 극찬을 아끼지 않았는데요. 밀리언셀러이자 그의 데뷔작이기도 한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우연한 계기로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사랑을 주제로 한 소설입니다. 그렇다고 단순한 로맨스 소설은 아닙니다. '사랑의 해부학'쯤이라고나 할까요? 사랑의 시작에서 끝에 이르기까지의 순간순간을 포착해, 철학적으로 그것도 아주 집요하게 뜯어 분석한 책이 바로 <왜 나는 너를 사랑 하는가>입니다. 그렇게 달달한 소설은 아니란 뜻이지요. 철학이 가미되어 쉽게 읽히지는 않지만, ‘알랭 드 보통특유의 위트 있는 필체로 재밌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앞전에 ‘정이현씨 소설, <사랑의 기초 - 연인들>에서 사랑의 시작에 우연이라는 요소가 어떻게 힘을 발휘하는가에 대해 포스팅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사랑의 중반부에 관한 이야기를 준비해 보았습니다. 이 책에서 개인적인 메모가 가장 많았던 곳이기도 합니다.

 

 

http://lala1123.tistory.com/entry/우연과-척으로-시작되는-사랑-사랑의-기초-연인들-정이현-장편소설

 

 

몇 달 뒤 우리는 브렉 레인의 베이글 가게에 있었는데, 우리 옆에 줄 서 있던 핀스트라이프 양복을 입은 우아한 남자가 클로이에게 말없이 구깃구깃한 메모지를 건넸다. 종이에는 갈겨쓴 커다란 글씨로 사랑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 괴상한 사건은 우리의 라이트모티프(악극에서 되풀이되어 나타나는 중심 악상)가 되어,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에서 그 사건을 끈임없이 다시 불러내곤 했다. 우리는 식당에서 가끔 그때 그 베이글 가게의 남자와 똑같이 수수께끼 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말없이 메모를 건네곤 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소금 좀 건네줘 같은 말만 적혀 있을 뿐이었다.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가 갑자기 깔깔대는 모습을 보고 괴상하게 여겼을 것이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13. 친밀성

 

 

  커플이 어느 정도의 시기를 거쳐 친밀함이 쌓이다 보면, 그들에게 어느새 공동의 유산이 생기게 됩니다. 공동의 유산은 단순히 물질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도 모르는 새에 상대방과 비슷한 말투를 쓰고, 비슷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생각이 비슷해지고, 상대방이 무얼 원하는지 표정만 봐도 알 수 있게 됩니다. 공유하는 추억과 경험이 많아져 주인공인 클로이처럼 다른 사람이 모르는 서로만의 이야기와 용어가 생기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눈에는 유치 뽕짝으로 보일지 모르는 용어들이 당사자들에게는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징표인 것입니다. 이러한 공동의 이야기와 용어는 라이트모티프가 되어 그들의 일상에 그대로 적용되기도, 한편으로는 변주되어 나타나기도 합니다. 주인공인 가 핀스트라이프 양복을 입은 우아한 남자를 따라 하는 것처럼 말이죠.

 

  여담이지만, 저는 여자 친구와(지금은 없습니다만) 무언가를 함께 경험한다는 사실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이없는 소리일지 모르겠지만, 훗날 나와 여자 친구에게 서로의 유대감과 사랑을 돈독하게 해줄 만한 특별한 사건(뭐 고난이어도 상관없는)이 하나 정도는 꼭 있었으면, 아니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사건 없이는 결혼을 결심할 수 있을까?’ 뭐 이렇게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이 챕터를 읽으면서 내가 생각하는 사건의 정의가 너무 대단한 것이 아니었던가의문을 품어보게 되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생각하는 것만큼 우리의 연애가 다이내믹하지는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더군다나 우리의 사랑이 세기의 사랑이라고 칭송받고, 미화되고, 일화로 남을 필요는 없었습니다. 제가 그럴만한 위인도 아니고요.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우리는 지금만으로도 충분히 서로에게 특별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또 해왔던 모든 경험이 하나의 사건이고 세상이었던 것입니다. 꼭 대단한 사건을 겪지 않고서도 우리는 지금까지의 라이트모티브를 이용하여 우리만의 세상 하나는 거뜬히 창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경험, 사랑 하나하나가 다 창조행위였던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그거면 충분하지 않겠냐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 그렇다고요. :)

 

 

그러한 일화들 자체가 흥미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클로이와 나만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라이트모티프들은 중요했다. 그것이 우리에게 우리가 남이 아니라는 느낌을 주었고, 일들을 함께 겪어가며 산다는 느낌을 주었으며, 함께 끌어낸 의미를 기억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클로이와 내가 둘이서 [정글을 뚫고 나가거나, 용을 죽이거나, 심지어 아파트를 함께 쓰지 않고서도] 하나의 세계 비슷한 것을 창조했다는 사실을 기억나게 해주었던 것이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13. 친밀성

 

 

  이 책의 부작용이랄까요? 사랑의 비밀을 알아버린지라(?) 사랑에 다가가는 저의 모습이 우스워 보일 때가 있더군요. ‘지금 네가 하고 있는 그 행동의 비밀이 뭔지 알아?’ 이런 생각에 제 행동이 불편해지더라고요. 사랑에 빠져야 하는 제가 사랑에 빠지고 있는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말도 안 되는 아이러니. 물론, 언젠가 정말 사랑에 빠진다면 어디 이런 생각할 여유가 있겠습니다만. 사랑에 있어서는 차라리 모르는 게 좋은 것 같기도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