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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의 감상

상승과 추락 사이 - 스탕달 <적과 흑>




  ''은 군인을 상징한다. '흑'은 성직자를 상징한다. 여기 나폴레옹을 숭배하고 가슴 속엔 야망으로 가득차 있어 '적'이고 싶은 '쥘리앵 소렐'이 있다. 하지만 '쥘리앵 소렐'에겐 '적'이기에는 모자른 하나가 있다. 바로 신분. 나폴레옹이 패망하고 왕정이 복고되어 귀족들이 자신들만의 세상을 만드는 이 시대에서, 목수의 아들인 '쥘리앵 소렐'은 '적'으로서 출세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쥘리앵 소렐'은 자신한테 맞지도 않는 '흑'이 되기로 결심한다. 미천한 신분을 벗어나 그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 방법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야망이란 단어가 '흑'에게는 이질적인 것처럼, '쥘리앵 소렐'에게 성직자는 처음부터 어울리지 않았다. '쥘리앵 소렐'은 신앙심으로 성직자가 되기는 커녕 자신의 비상한 능력인 암기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데에만 열중한다. 평생 신만을 위해 살아온 사제들에게는 그 모습이 당연 튈 수밖에 없다. 사제들은 판단한다. '이 놈은 성직자가 되기에는 야망이 너무 크다'. 자신을 홀대하는 사회에 대한 증오심으로 가득 찬 '쥘리앵 소렐'은 결국 자신의 신분을 상승시켜 줄 수 있는 사교계에 발을 들인다. 그 누구보다도 매력적인 남자의 가면을 쓰고 천천히 접근한다.  

 


심리주의 

 

  '스탕달'의 '적과 흑'은 '심리주의 소설'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을 받는다. 그만큼 소설 속 주인공의 심리묘사는 치밀하고 섬세하다. '소렐'의 야망에 대한 묘사는 물론이며, 애정관계에 있어서의 심리 묘사는 단연 으뜸이다. 밀고 당기는 행동 속에 숨겨진 그들의 내면은 노골적이기까지 하다.

   


두 여인 


   '쥘리앵 소렐'에게는 두 명의 여인이 있다. 한 명은 자신이 가정교사로 일했던 베르에르 시장의 아내인 '레날 부인', 한 명은 '라 몰 후작'의 딸 '마틸드'다. 비상한 주인공이기에 천하의 매력적인 여자들도 그에게는 곧잘 넘어온다. '소렐'의 신분은 그의 미소년 같은 얼굴에, 비상한 능력에 그리고 위트 있는 행동에 묻힌다. 철저히 계산 된 그의 포커페이스가 감탄스럽다.

 

 

'레날 부인'과의 관계는 그 당시에는 파격적이었을 불륜관계다. 허영심 가득한 '레날 시장'에 대한 반발심으로 시작한 그의 사랑은, 후에 '소렐'이 죽을 때는 평생을 잊지 못할 사랑으로 남게 된다. 그들의 관계는 애초부터 불륜이기에, 발각되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의 묘사는 아찔하다. 그러면서도 눈을 피해가며 즐기는 사랑은 스릴있다. 사람들이 있음에도 대뜸 손을 잡는 모습이나, 밤마다 사다리를 놓아가며 창문으로 출입해 사랑을 나누는 그들의 모습은 인상적이다. 신앙심 두터운 '레날 부인'은 자신의 아들이 병들어 죽어 갈 때에 죄의식을 느낀다. 아들의 병이 자신의 불륜에 대한 대가라며 스스로가 자책하고 반성한다. 그녀의 순수한 마음과 신앙심이 돋보이는 순간이다. 하지만 사랑의 감정은 그녀의 죄의식조차 압도해 버린다. 사랑이란 묘약에 몽롱해진 그들은 걷잡을 수 없었고, 그림자가 긴 그들의 사랑을 시장 또한 눈치 챈다. '소렐'이 도망가면서 그들의 사랑은 끝이 난다. 불륜이라는 폐륜을 넘으면서까지 사랑하는 그들의 모습은 작가가 추구한 사랑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정열적인 사랑 말이다. 실제 '스탕달'은 그의 투박한 외모 때문에 병적으로 소심했다고 한다. '스탕달 증후군' 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아마 이 때문에 '스탕달'은 자신과는 상반되는 '쥘리앵 소렐'이라는 매력적인 주인공으로 자신이 하지 못한 사랑 이야기를 표현했던 것 같다.



'마틸드'에 대한 사랑의 시작 또한 '레날 부인'과 다르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인 '라 몰 후작'에 대한 반발은 '마틸드'를 유혹하라는 내면의 명령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소렐'의 유혹에도 '마틸드'는 쉽게 자신을 허락하지 않는다. '소렐'이 자신의 신분에는 어울리지 않는, 한참 아래에 있는 사람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소렐'의 증오심과 '마틸드'의 자존심은 그들의 관계를 이끌어가는 이상한 원동력이었다. 서로가 지지 않기 위해 사랑을 걸고 일종의 게임을 했던 셈이다. 보이지 않는 내면의 이중성이, 인간의 얄팍한 마음이 거짓 없이 묘사되어 씁쓸했다. 내가 대중매체로 접해왔던 프랑스 궁정의 화려한 모습과 내가 살아 가고 있는 사회의 모습이 허구적일 수 있다는 생각에 회의감 마저 들었다.

 

 

'소렐'은 '마틸드'와 사랑함으로써 많은 것을 얻었다. 절세미인인 그녀를 가짐으로써 얻을 수 있는 명성, 그녀의 집안의 부, 그리고 자신의 신분을 상승시켜 줄 수 있는 권력이 그것이다. 그는 '라 몰 후작'의 권력으로 잠시나마 그렇게도 원하던 장교를 맡기도 한다. '마틸드' 또한 '소렐'을 사랑함으로써 자신의 품위를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신분이 미천한 '소렐'을 남편으로 맞음으로써 귀족으로서의 아량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소렐'은 죽기 전 '레날 부인'을 통해 순수한 사랑을 깨닫는다. 하지만 '마틸드'는 여전히 귀족으로서의 보여주기 식 사랑에 집착한다. 감옥에 있는 그를 극진히 대하는 자신을 사회가 어떻게 볼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전시용 사랑'이다. '소렐'이 죽은 후에도 그의 무덤을 대리석으로 도배해버리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두손 두발 다 들었다. 



상승욕 

 

  '소렐'은 귀족들을 그렇게도 혐오하면서 출세에는 왜 그렇게 목을 맬까? 책을 읽으면서 계속 도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인간의 '상승욕'에 대해 생각해봤다. 높은 자리에 올라간다는 것, 누구나가 다 원한다. 높이 올라가면 사람들의 대우가 달라지는데 그 자리를 누가 마다할까. 그렇기에 죄를 짓지 않는 이상 인간의 상승욕은 나쁘지 않다. 그런데 사회는 너무 영악하다. 이를 악용해 조금의 자리를 내어주고 많은 사람들을 경쟁시킨다. 적자생존의 방법으로 유능한 인재를 가리기 위해서다. 능력이 탁월하면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그렇기에 몇몇 영리한(?) 사람들은 카멜레온처럼 자신을 변화시킨다. 내가 올라가기 위해서 이기적이게 변하고, 나를 올려줄 수 있는 사람과는 철면피 깔고 친해진다. 이런 짓을 잘하는 사람을 얄밉지만 우리는 사회생활 잘한다고 말한다. '소렐'도 사회생활로는 으뜸 가는 인물이다. 능력은 월등했으나 신분이 미천했으므로 자신의 신분을 상승시켜 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계획적으로 접근한다. 자신이 그렇게도 원하던 군 장교가 되었기에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하지만 이런 '소렐'도 한 순간에 추락해 버린다. 그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세력의 트랩에 걸렸기 때문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믿지 못해 총을 쏴버린 '소렐'은 단두대에서 삶을 마감한다.

 

 

이 죽음은 많은 의미를 남긴다. 영리한 '소렐'은 분명 자신의 상황을 살펴볼 여유를 가졌어야 했다. 어떤 바보가 사람들 다 보는 한복판에서 사람을 죽일 생각을 할까? 자신의 실패에 쉽게 목숨을 날려버릴 행동을 했다는 것 자체가 분명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의미한다. '소렐'의 정신은 오직 야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야망을 풀어줄 수 없는 사회에 '소렐'은 언제나 비관적이었다. 그렇다면 '소렐'의 야망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소렐'은 '나폴레옹'을 보고 청춘의 영웅적인 꿈에 젖어 있었다. 코스타리카의 촌놈이 프랑스의 황제가 되다니!. '나폴레옹'의 일대기는 그에게는 성서였다. 시대적 한계를 극복한 '나폴레옹'은 신 이상의 존재였다. '소렐'은 자연스레 그의 삶을 좇는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점은 발생한다. '소렐'에게는 영웅적 삶 말고는 어떤 목표도 없었다. 하나의 목표에 모든 것을 받쳤다. 상승하고 싶은 욕구가 목표에 대한 집착이 된 것이다. 결국 목표에 실패한 그에게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고, 추락하는 그의 자존심을 잡아 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퇴폐적인 시대가 만든 비극이다.

 

 

꿈을 위해 달려가는 우리도 잠시 스스로의 목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지금 이루려는 이 꿈이 정말로 나에게 맞는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꿈에 한계를 두자는 소리가 아니다. 다양한 경험이나 시행착오를 통해 내가 어떤 것을 잘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넓혀 보자는 뜻이다. 목표에 실패하더라도 최소한의 평정심을 가지고 재기할 수 있을 것이다.

 


상승과 추락 사이 

 

  몇 해 전부터 'm.net' 의 '슈퍼스타K' 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이 전국을 휩쓸고 있다. 오디션에서 생존하는 참가자들에 대한 기사가 연일 인터넷을 오르락내리락 할 정도이다. 심사위원들이 실력이나 개성이 없는 참가자들에게 독설을 퍼 붇기로도 유명하다. 시즌 3의 심사위원 '윤미래' 씨는 독설에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참가자들에게  솔직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재능이 없음에도 가수라는 꿈에 집착하는 수많은 참가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될 것인지'를 생각하지 말고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하라는 말이 있다. '가수가 될 것이다' 라는 직업적 목표를 갖는 것 보다 '사람들과 음악을 공유하면서 살겠다' 라는 식의 삶의 태도를 갖는 것이 더 중요함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럴때 개인은 가수에 실패하더라도 여유를 가지고 음악으로 할 수 있는 여러 일을 바라보게 된다. 

 

 

우리의 삶은 상승과 추락 사이에서 항상 방황한다. 그리고 누구나가 다 그 방황을 벗어나 상승하고 싶어한다. 이해할 수 있는 상승욕이다. 하지만 그 '상승욕'이란 열매에서 '맹목'이란 씨앗은 꼭 빼도록 노력하자. 먹는데에 너무도 열중한 나머지 씨앗이 기도에 걸리는, 그런 불상사는 없도록 해야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