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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의 감상

코야니스카시(koyaanisqatsi 1983) - 비서사영화의 진수!



  

  교수님이 말씀하셨던 대로 이 영화는 내가 알지 못한다면 극단적으로는 내가 사랑하는 지인들이 이 영화의 제작자로서 봐달라고 소개하지 않는 이상은 살아가면서 절대 볼 수 없는 영화였다. 단지 영상과 소리로만 1시간 반이 지나갈 뿐 그 어떤 서사도 찾을 수 가 없었다. 그렇기에 우리가 감독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 또 지나간 1시간 반의 소중함을 지키기 위해서는 집중해야 할 것이 단 하나 밖에 없었다. 바로 이미지 속에 담긴 그리고 그 이미지의 배열 속에 담긴 의미를 읽는 것 이었다. 도대체 감독은 어떤 사람이기에 이렇게 실험적인 영화를 만들었는지 흥행은 생각하고 만들었는지 이 영화의 제작 의도는 무엇인지 등 혼자 이런 저런 고민을 하다 결국 이 글을 쓰게 된다.



  우선 영화는 크게 자연, 기계 문명, 도시 속의 사람들, 정리 이렇게 4개로 나눠지는 것 같다. 이렇게 나눌 수 있는 이유는 각 각의 섹션 마다 대표되는 이미지들이 끊임없이 반복 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선 자연 섹션에서는 자연의 광활한 여러 모습들이 나타난다. 버드아이 샷, 비행기를 이용한 샷 등 자연을 가장 웅대하게 표현할 수 있는 여러 기법들이 사용되며 영화상에 표현되는 자연의 모습 또한 그렇게도 아름다울 수 가 없다. 협곡, 구름, 수증기, 빛, 어둠, 물, 나무 등은 동적인 것과 정적인 것으로 구분되어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혹 그 속에 만약 우리 인류가 나온다면 그 균형이 깨져버릴 것만 같다. 감독이 말하는 균형 있는 삶이란 자연 그 자체에서의 삶이 아닌가 싶다.



  이런 자연 속에 갑자기 매연을 뿜는 기계가 등장 한다. 그 기계에 의해서 자연은 파괴 되고 그 뒤로 인류가 등장한다. 공장, 획일적인 모습의 건물들, 핵실험 등의 이미지가 나열 되고 그 속에서 자연은 파괴 된다. 고속도로 위에는 수많은 자동차들이 지나가고 엄청난 양의 폐차 또한 존재한다. 기계 문명에서의 이미지들은 수없이 동적이고 분주하다. 그 움직임은 자연과는 완벽히 대조 된다. 원자력 발전소 앞의 해변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피서를 즐기고 있다. 인간을 파괴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 인간들에게 피서를 제공하고 있는 어이없는 상황이 연출된다. 항공모함 위에 비행기들로 표현된 E=mc^. 이 공식 속에서의 에너지는 무한정 커지게 될 뿐 작아질 줄 모른다. 그 에너지의 증가만큼 인류의 위기도 커지게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멈추지 않는다. 폐허가 된 어느 도시가 등장한다. 그 속에서의 삶은 비참하며 여러 부랑민 들이 모여 살고 있다. 그들에게는 집이 없다. 하지만 도시에서는 멀쩡한 아파트를 폭파시키고 있다. 그 폭파는 여러 잔재를 남기면서 진풍경을 연출한다. 감독이 의미하는 불균형에는 이런 의미도 있지 않나 생각해 보게 되었다.



  다음 섹션에는 도시 속의 사람들이 나온다. 도시 속에는 엄청난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출근하고 일하고 다시 퇴근하며 일정한 이동의 모습을 만들어 낸다. 감독이 인위적으로 스피드를 조절하였기에 이들의 이동은 더욱더 빠르게 느껴지고 끝이 없으며 속된 말로는 미친 듯 한 분주함을 만들어낸다. 그들에게 목적지란 없어 보인다. 시간은 지나가고 이동은 도보에서 끝나지 않는다. 수많은 자동차들이 퇴근하며 밤에는 그 움직임이 불빛으로만 보인다.움직인다기 보다는 흐른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만큼 그 움직임이 빠르고 거침없다. 도시에서는 불이 꺼지지 않는다. 어둠이 있을 때 밤으로서 의미가 있는 것인데 어째 도시에서는 낮만큼 이나 밤이 밝다. 은은한 빛을 뿜으며 뜨는 달빛도 어둠 속에서야 아름답지 도시의 불빛 앞에서는 그 모습이 쓸쓸하기 짝이 없다. 이런 도시 속의 삶은 컨베이어 벨트에서 극대화 되어 표현된다. 사람들은 컨베이어 벨트위의 상품들처럼 획일적이고 개성이 없다. 획일성 속에서 인위적으로 짜 맞춰진 듯 한 그들의 삶은 오히려 차가워 보인다. 그들에게 여가란 없으며 밤 또한 없다. 단지 내일도 내일 모레도 오늘과 같을 것이다.



  마지막 섹션은 이전 섹션의 분주함과는 다르게 차분해진다. 인공위성에서 본 도시의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잘 짜여진 직조물이 교차되어 나타난다. 그 두 개의 이미지는 참으로 흡사하다. 잘 정리되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지만 차갑다. 몬드리안의 그림처럼 철저한 계획에 의해 만들어지는 사회는 이렇게 인공적이고 차가운 느낌으로 있다. 사람들이 엘리베이터 속으로 들어간다. 엘리베이터 속은 답답하고 빠져나갈 곳이 없다. 우리 또한 답답하고 개성 없는 사회에 우리 스스로를 가두고 있다. 그런 사회 속의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무뚝뚝하고 무언가를 경계하는 듯 하다. 감독의 의도에 따라 여러 사람들의 표정이 나열되어 나타난다. 사회에 행복이 없어 보인다. 우리가 그렇게도 믿고 있던 현대사회의 기술 들이 다시 총, 칼이 되어 사고현장이 된다. 증권 거래소의 사람들이 귀신처럼 표현되어 있다. 개성 없는 사회 속에서 반복적인 일만을 하는 우리들에게는 신체란 귀신처럼 단순 도구일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는 기술 발전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로켓이 폭발해 버린다. 그리고 그 잔재는 끝없이 추락한다. 여기서 감독은 두 가지 의미를 던져 주는 것 같다. 하나는 떨어지는 잔재와 같이 한없이 추락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 하나는 떨어지는 잔재 속에서도 꺼질듯 말듯 타오르는 불꽃과 같이 희망을 염원하는 감독 내면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