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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의 감상

'우연'과 '척'으로 시작되는 사랑 - 사랑의 기초 - 연인들, 정이현 장편소설

 

 

 

  서점에서 무슨 책을 읽을까 고민하는데 알랭드 보통이라는 이름이 눈에 확 들어왔다. <사랑의 기초연인들>책은 도끼다에서 박웅현씨가 그렇게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알랭드 보통과 공동 작업한 책이라기에 거리낌 없이 구매했다.

 

 

  <사랑의 기초 연인들>알랭드 보통정이현이 공동 작업한 책인데, 사랑을 공통주제로 정이현은 서울의 한 커플을, 보통은 런던의 결혼한 부부를 이야기한다.

 

 

  30대 커플의 이야기인데, 만남, 연애의 과정, 결별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가 순차적으로 전개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한 커플의 만남부터 사랑이 불타는 순간 그리고 서서히 식어 결국에는 이별하게 되는 순간까지의 이야기를 200pg가 조금 넘는 한 권의 책으로 만날 수 있다는 얘기다. 30대가 적지 않은 나이인 만큼[한국에서는 결혼 적령기의 나이잖아] 그저 철없는 연애 이야기가 아닌 어느 정도의 진지한 만남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이며[둘 다 30대 이다 보니 섹스의 시작에서의 충돌, 윤리적인 문제(?) 뭐 이런 소재는 나오지도 않더라고] ‘직장’, ‘책임감’, ‘부모님의 눈치등 결혼에 골인하기 위해 고민해야 하는 현실적인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두개의 서로 다른 포물선들이 공중에서 조우해 마침내 하나의 점으로 겹쳐진 순간에 대하여, 그 경이로운 기적에 어떻게 탄성을 터뜨리지 않을 수 있을까. 한없이 평범해 보이는 매일의 일상, 그 틈새에 숨겨져 있는 치명적인 운명의 조각들을 찾아내는 일은 경이로운 놀이였다. 하나하나 따져보면 참 묘하지. 일이 겹치고 겹쳐서.”

 

<사랑의 기초 연인들 108pg> 

 

 

  내가 뭐 사랑에 대한 책을 많이 읽은 건 아니지만 사랑을 소재로 한 책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제가 있다. 바로 우연이다. ‘알랭드 보통<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밀란 쿤데라<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그리고 이번에 읽은 정이현<사랑의 기초 연인들>에 이르기까지 우연이라는 주제는 작가의 시선을 이끄는 독특하고 재미있는 소재였나 보다. 하긴 그럴 것도 사랑이란 게 따지고 보면 엄청난 우연, 확률을 뚫고 탄생하는 기적적인 것이잖나. 물론 나의 탄생에도 과연 엄청난 우연과 확률이 있었다. 우리 아버지가 행정적인 오류로 입대를 늦게 했다면, 제대하고 할아버지께 10만 원 받고 출가하지 않았다면, 우리 작은 아버지가 하필 부산에서 일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다른 지방에서 아빠의 첫 커리어를 시작했다면, 부산의 정말 엄청나게 많고 많은 식당 중에서 우리 할머니가 경영하는 식당에 점심을 주문하지 않았다면, 우리 엄마가 그날 배달하지 않고 외할머니나 이모가 배달했다면, 그날 아빠가 점심을 먹지 않고 외부에 나가있었다면, 아빠나 엄마가 그 당시 만나고 있던 애인이 있었다면, 좋게 이어졌다지만 결혼까지 골인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내가 경쟁(?)에서 1등을 하지 못했더라면 나는 태어나지 못했겠지? 이걸 수치화한다면... 음 난 수학에 약하니 엄청난 확률이란 사실만 알아두자.

 

 

  이런 엄청난 확률을 뚫고 만난 연인은 사랑의 초기, 만남의 엄청난 경우의 수, 로또보다도 낮은 확률에 압도된다. 그러면서 새삼 이 만남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깨닫는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이런 확률을 뚫고 사랑에 이루어진 우리는 운명이라고. 솔직히 우리가 만난 이 확률, 이 경우의 수, 운명 말고는 딱히 설명할 방법이 없지 않나?

 

우리들의 운명[만약 신이 있다면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 운명의 메커니즘]의 경이로움 그리고 소름 끼치는 신비함[만약 조금만 어긋나더라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우리의 만남] 때문에 연애의 초반부 우리는 그렇게도 우리의 공통점, 우리의 사랑을 미화할 어떤 것들을 찾았나 보다. 어쨌든 우리는 운명이니까. 좋아하는 가수, 노래, 그림, 드라마, 스타일, 취향, 음식, 지역, 웃음소리, 하고 싶은 일, 미래, 성격 그리고 손바닥 위의 점까지도. 연애 초의 연인들에게 운명의 손길이 닿지 않은 소재는 정말 아무것도 없다.

 

 

 

그들이 서로에게 매혹된 원인은, 각각 상대방이 아주 훌륭한 청자라고 믿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사랑의 기초 연인들 114pg>

 

 

  이 문구가 왜 그렇게 눈길을 끌었는지 잠시 생각해보았다. 소설 속 남자 주인공 준호나 실제인 가 어째 겹쳐 보이더라.

 

 

  누군가가 나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준다는 사실, 참 좋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랫말을, 그것도 나를 위해 손수 실천하고 있는 사람을 마주하고 있다면 아마 밥값은 물론 커피까지 사줘도 아깝지 않을 테다. 대부분의 연애가 아마 이렇게 시작되지 않을까? 막 연애를 시작한 사람에게 물어보면 다들 그렇게 말하잖나. 나랑 말이 정말 잘 통하는 거 있지? 내 얘기도 잘 들어주고.”

 

 

  허나 이게 일종의 제스처일 수도 있다. ? 나는 너와 친해지고 싶으니까, 친해지기 위해서는 당신의 말을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란 걸 증명해야 하니까. 그래서 잘 들어주는 척을 하게 된다. 상대방의 경청이 사실은 제스처였다는 건 연애 초에는 알 수가 없다. 서로 연인이라지만 아주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허나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이런 제스처는 드러나게 된다. 연애 초반에는 상대방의 몸짓, 손짓, 말투, 취향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웠다지만 웬만큼 상대를 알고 있다는 중반부에는 긴장이 풀려 상대방을 알기 전 본연의 나로 돌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소설 속 남자 주인공 준호도 그랬다. 연애 초, ‘준호민아의 말 하나하나에 관심을 기울였고 민아준호의 그런 점을 좋아했다. 허나 시간이 흐르고 준호민아가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준호의 원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차라리 퇴근 후에 학원이라도 다녀보는 건 어때?”

무슨 학원?”

민아가 날카롭게 반응했다.

많잖아. 일본어나 요리나.”

민아는 화가 났다. 민아가 보이게 준호의 가장 나쁜 습관은, 겉으로는 남의 말을 경청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가슴 깊이 공감하지 못한다는 거였다.

또 그런 식이다. 누가 일어랑 요리 배우고 싶대?”

싫어?”

공무원 시험 준비할까 한다고 말했었잖아. 잊어버렸어?”

 

 

 

 

  나도 그랬던 것 같다. 처음에는 열심히 들어주는 척하면서 상대방과 가까워졌지만[이건 의도라기보다는 본능인 것도 같다], 시간이 흐르고 상대방이 너무 편해지는 시기가 닥치면서 나의 도 어쩔 수 없이 드러나게 되었다. 내가 무심하게 던진 말이, 나의 무심한 대답이 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날 때, 그 민망함, 수치심 때문에 괜히 상대방에게 더 화내게 되는 나를 보게 되었다. 이런 적이 있었다. “내일 뭐해?”라고 난 물었고 상대방은 내일 뭐 해이렇게 대답을 했다. “, 그렇구나. 그럼 내일 못 보겠네.” 이렇게 대답을 했다. 그러다가 한 십분 뒤 난 또 내일 뭐해?” 이렇게 물었고 상대방은 화를 냈다. 나도 화를 냈다. 그냥 민망해서.

 

 

  경청하는 척, 더 크게는 상대방을 위한다는 모든 제스처는 필요할 수밖에 없다. 거의 모든 인간이 이 제스처의 족쇄를 차고 있다고도 생각한다. 처음부터 나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상대방과 친해지기 위해서는 당연히 이기적인 나를 숨기고 상대방에 맞춘 가면을 쓸 수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슬프다. 본연의 나를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 사실이 괜히 거짓말하는 것 같아 찝찝하다. 과연 한 점 부끄럼 없이 나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을 나는 만날 수 있을까? 아니 존재하기는 할까? 부부의 의미가 어째 더 심오하게 다가온다. 세상을 알기에, 인간을 알기에, 나를 알기에 나는 아직 너무 어리다.

 

 

  아, 그나저나 내가 자꾸 본연의 나, 본연의 나 이렇게 말하는 데, 나 그렇게 숨길 것 많을 정도로 이상한 사람은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