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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한

설거지 방정식

 

 

  요즘 내 부전공은 주부다. 일과의 50% 아니 그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 집안일이기 때문이다. 식사 준비, 청소기 밀기, 쓰레기 청소, 빨래 개기 그리고 설거지까지. 오전 내내 치러야 할 전투가 첩첩산중이다. 그렇게 청소를 끝내고 오후가 되면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는 순간이 온다. 그럴 때면 드러누워 혼자 생각하곤 한다. ‘난 정말 설거지를 잘해.’ 부끄럽지만 사실이다. 나는 그 어떤 청소보다도 설거지를 잘한다. 속도는 물론이거니와 깨끗함까지. 모든 알바 경험에서 설거지가 빠진 적이 없으니 실무적으로도 상당하다. 까다로운 엄마라는 이름의 고객까지도 만족하게 하는 내 설거지 신용도는 99.9%. 이쯤 되면 궁금해지시리라 생각된다. ‘이 친구의 설거지 노하우, 도대체 뭐야?’

 

 

step 1. '차례차례 하나씩'

 

일단 설거지 더미를 마주하면 절대 당황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설거지거리일 뿐이다. 그렇게 마음을 가라앉혔다면, 이제 설거지를 하나하나’, ‘차례대로닦아 가면 된다. 이것이 내 첫 번째 노하우이다. 너무 간단하고 당연한 이야기라고? 당연한 이야기라고 웃어넘기겠지만, 초보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실수 중 하나이다. 기본을 무시한 초보들은 많은 설거지 더미 속에서 허둥지둥 이것저것을 만질 뿐이다. 언제 다하느냐는 조급함으로 여러 개를 같이 닦아봤자 물로 씻어낼 때 보면 얼룩은 그대로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속담이 있듯이 차례차례 하나씩 설거지해나가는 습관을 들이자. 생각보다 금방 끝낼 수 있는 게 설거지구나라는 사실을 금방 깨우칠 수 있을 것이다.

 

step 2. 대야에 담아 놓고 한 번에

 

'차례차례 하나씩' 그 다음으로 중요한 요소이다. 설거지할 때는 모든 설거지거리를 대야에 담아 놓고 시작하는 게 좋다. 초보들은 세제 한 번 짜고 몇 개 닦고 또 세제 한 번 짜고 몇 개 닦고 이런 식으로 설거지를 한다. 물론 물은 틀어 놓은 채 말이다. 이는 속도의 측면에 있어 무진장 비효율적인 방식이며, 세제는 세제대로 물은 물대로 낭비하는 재앙을 불러온다. 그러니 앞으로는 대야를 준비해 물을 받고 세제를 푼 후 모든 설거지거리를 대야에 모을 것을 추천한다. 대야를 준비한 그대는 설거지 고수의 싹이 보이는 사람이다.

 

step 3. 큰 것부터

 

설거지를 하다 보면 설거지거리의 사이즈가 다 다르다. 숟가락 젓가락부터 대야에 이르기까지. 여기서 숟가락 젓가락부터 씻는 바보 같은 짓 하지 말고 일단은 큰 것부터 해치워 나가자. 설거지 더미의 부피가 줄어들면 다른 설거지를 해치워나가기 무진장 수월해진다. 부피가 줄어들면 심리적으로 안도감까지 드니 일석이조다.

 

step 4. 디테일

 

다 잘해 놓고선 작은 고춧가루, 마른 밥풀 하나 때문에 욕먹으면 참으로 기분 나쁘다. 고로 한 번 닦을 때 손목 한 번 더 돌려주는 섬세함을 놓치지 말지어다. 모든 일에서건 디테일은 장인의 경지로 이끈다.

 

step 5. 뜨거운 물에서

 

설거지는 웬만하면 뜨거운 물에서 할 것을 추천한다. 일반적인 설거지거리는 물론이거니와 굳은 밥풀, 탄 냄비, 기름 덩어리의 프라이팬 등 언제 어디서 만날 수 있는 설거지 복병들을 해치우는 데에 뜨거운 물 만큼 좋은 우방군은 없다. 뿐만 아니라 뜨거운 물을 사용하면 기름값 아껴야겠다는 위기의식마저 드니 설거지를 해치워나가는 속도는 배가 된다. 뜨거운 물은 설거지를 더 잘하기 위한 물량공세쯤으로 이해하면 편할까?

 

  

  이렇게 정리하고 나니 문득 우리 고모부가 생각난다. 원주 어디 산골 동네에 사는 우리 고모부는 공부가 아닌 자신의 삶을 통해 체득한 지혜를 개똥철학이라 명명했다. 그리고 개똥철학은 삶을 살아가는 데에 그 어떤 지식보다도 훌륭하다고 자부하시곤 했다. 오호라. 나 또한 삶을 통해 체득한 몇 안 되는 지혜인 설거지 노하우를 어떻게 나만의 개똥철학으로 정립할까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삶을 대하는 자세와 설거지 노하우가 절묘하게도 매치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만의 개똥철학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오랜 고민 끝에 나만의 개똥철학을 이렇게 명명해봤다. ‘설거지 방정식

 

  (이름부터 거창한) 설거지 방정식을 이용해 설거지 노하우와 삶을 대하는 방식을 하나하나 치환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어떤 일이건 차례차례 하나씩 해결해 나갈 것

2. 한 번 할 때 몰아서 빡세게 할 것

3. 당연히 큰일부터 처리해 나갈 것

4. 어떤 일이건 장인정신으로 한 번 더 점검할 것

5. 더 나은 결과를 위해 물량공세를 아끼지 말 것

 

  이렇게 방정식을 만들고 흐뭇하게 쳐다보고 있자니 아주 기본적이고도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한다. 사실 설거지는 정말 하기 싫다는 것이다. 그리고 요즘 내 삶도 스스로 느끼기에 참으로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설거지가 아무리 삶의 교훈을 준다 하더라도 설거지가 재미없고, 설거지 노하우를 삶에 대입한다 해도 그 삶이 재미가 없다면, 설거지 방정식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공식이 되어버린다. 고로 설거지 방정식에 대전제 하나를 추가해 본다. 꼭 재미있어야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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