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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의 감상

노르망디 코리안, 꼭 돌아가고 싶습니다 - 컬투쇼 이재익 PD의 <아버지의 길>

  



  인생을 살면서 앞으로 얼마나 많은 책을 마주할지 모르겠지만제게 인생의 책이라고 손꼽을 수 있는 책 한 권이 더 생겼습니다현재 ‘2시 탈출 컬투쇼’ PD로도 유명한 이재익 씨의 아버지의 길입니다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들박웅현의 책은 도끼다’ 등 제게 커다란 울림을 줬던 책들이 몇몇 있었는데한동안 찾기 어렵다가 오래간만에 큰 수확을 올렸습니다저는 아버지의 길’ 1, 2권을 있는 시간 없는 시간 다 내어 꼬박 사흘 동안을 읽었는데오래간만에 미친 듯이 무엇인가에 몰두할 수 있어 참으로 행복했습니다앞으로 인생의 책이 늘어나는 만큼 제 삶도 더 풍요로워지리라 믿습니다. 

 

 

  프랑스 작가 기욤 뮈소의 당신거기 있어줄래요?’ 를 읽었을 때의 일입니다소설을 읽는 내내 저는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습니다눈앞에 주인공과 사건이 흘러간다고나 할까요물론 모든 소설이 그렇겠지만프랑스 작가의 이 소설은 더욱 그랬습니다소설을 다 읽고 번역자의 에필로그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이런 느낌은 서사의 빠른 진행즉 소설의 템포와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아버지의 길에서도 이런 느낌을 받았습니다아니나 다를까 주인공 길수의 이야기, ‘월화의 이야기, ‘짜보’, ‘정대’, ‘명선의 이야기 등은 바통터치를 하듯 빠르게 빠르게 넘어가 독자로서 지루할 틈이 없었습니다길수의 이야기가 지루할 때쯤 월화의 이야기가 나오고 뭐 이런 식입니다여기에 사람 애간장 타는 타이밍에 다음 이야기로 전환하는 작가의 재치와얽히고설키는 관계가 결합하니 긴장감은 배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길은 TV방송으로도 소개된 노르망디 코리안을 바탕으로 한 소설입니다세계 2차 대전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조선인이 독일 포로로 잡혀있기까지의 죽음의 여정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소설을 읽고 지금 제가 이렇게 평화로운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낄 정도였습니다그 정도로 상상하기 싫은 세상이 소설 속에는 펼쳐져 있습니다.

 

 

  주인공 김길수의 죽음의 여정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공포외로움의 연속이었습니다일본 관동군으로 징병되어 소련과의 전투 중 포로가 되어 포로수용소에 갇히고그러다 소련군의 자격으로 독일과 전쟁 중 포로가 되어 나치 수용소에도 갇히고전쟁사 중 최악의 전쟁이라는 노르망디 전투’ 에 독일군으로 참전하여 연합군의 포로가 되기도 하는 등 그의 여정은 잡히고 싸우고의 연속이었습니다일상이 죽음이고 지옥이고 노동인 셈입니다탈출구는 없습니다희망을 여러 번 꿈꾸고 구체적인 어떤 행운을 잡았을 때도일개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본국으로의 송환은 없었습니다. 

 

 

 

우리가 포로 협상 협정을 맺은 나라는 일본이요. 더구나 조선은 일본의 속국 아니오? 굳이 조선인들을 돌려보내겠다면 그냥 관동군으로 돌려보내면 그만입니다. (중략)무슨 수로 그들을 운송할 거요? 전용 운송기라도 마련해야 하오? 아님 세르게이 대위가 손을 잡고 데려다주는 건 어떻소? 그 말에 다른 장교들이 소리 내어 웃었다.

- 아버지의 길’ 2185pg -

 

 

  그럼에도 그가 전쟁에서 살아남고 또 삶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에게 건우라는 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아들의 생일에 선물도 주지 못한 채 강제로 징병된 그는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 하나로 지옥 같은 나날을 버티는데읽다 보면 그의 상황에 공감이 돼 가슴이 먹먹해집니다엄마도 없는 8살짜리 애를 혼자 집에 놔야하는 절망적인 상황그렇다고 돌아올 날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며 가까워지려 노력할수록 더욱 멀어지는 물리적 거리가 얼마나 답답했을까요소설의 후반부에 '건우'는 길수를 아는 선교사에 의해 편지를 전해 받는데그 편지의 내용이 정말 슬픕니다 

 

 

 

아빠가 불행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꼭 알아두어라. 아빠는 언제 어디서든 한순간도 불행했던 적이 없단다. 사막에서도, 눈보라 속에서도 니 얼굴만 떠올리면 행복했으니까. 희망이란 그런 것이다. 절망보다 힘이 세고 죽음도 이긴다. 너는 나에게 빛이고 희망이다. 그래서 고맙다 아들아. 보고 싶다 아들아. 사랑한다,아들아. 반드시 살아서 돌아갈게. 나에게 허락된 행운과 목숨이 다할 때까지.

- '아버지의 길' 2334pg -

 

 

  해피엔딩을 그렇게도 원했지만현실은 드라마가 아니었습니다. '길수'는 돌아오지 않았고 한 통의 편지는 '건우'의 머릿속에서 80년의 세월을 함께 합니다어린 '건우'는 이제 할아버지가 되어 호스피스 병원에 누워있습니다그리고 기록되지 않으면 영영 사라져버릴 아버지의 처절한 역사를 작가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그 처절한 이야기를 이재익 PD는 저를 포함한 많은 독자에게 들려주고 있고요이 평화로운 세상에 참으로 감사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길수'의 이야기가 메인이기는 하지만곁가지로 구성된 다른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도 구구절절합니다. ‘정대명선의 사랑이야기가 저에게 참 와 닿았습니다사랑하고 있어서 인지 충격도 많이 받고 울컥한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한 가지 물어보겠습니다상상도 하기 싫으시겠지만, 만약 당신의 여자가 위안부로 끌려가 당신과의 약속은 모두 까먹은 채 미쳐있다면정신뿐만 아니라 몸도 만신창이가 되어 앞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상황이라면 당신은 어떤 심정일까요제가 느끼는 기분과 여러분이 느끼는 기분이 다르지 않을 겁니다그들의 사랑이야기가 이렇게 참담합니다후에는 더 파국으로 치닫게 되고요. ‘정대의 울부짖음을 생각하니 한숨만 나옵니다 

 

 

  '이재익 PD'의 이름을 이제는 까먹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길이라는 소설이 제 머릿속에 완전히 각인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그리고 '이재익 PD'를 보면서 새삼 PD의 길이 이렇게 멀고도 험한가를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이런 소설을 쓰는 사람과 내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까?‘ 세상은 너무 불공평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