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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의 감상

마지막 장은 절대로 먼저 읽지 마십시오 - 추리소설 '숙명'

 

 

 

  자체 소설 10부작 중 2부작으로 소개할 소설은 히가시노 게이고<숙명>이다. 부대 정훈도서로 들어왔기에 요즘 핫 한 신간인 줄 알았는데, 10년도 더된 아니 거의 20년 전에 쓰인 책이었다. 이 사실은 책을 다 읽고 나서 알게 되었다. 그래서 더 놀랐다. 20년이 지난 소설의 반전에 내가 놀라고 흥미를 느끼게 될 줄이야. 요즘같이 이야기가 넘치는 세상에서 20년도 더 된 추리소설이 아직도 먹히고 있다.

 

 

  이 책을 읽게 된 결정적인 이유. 호기심을 자극했던 슬로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은 절대로 먼저 읽지 마십시오.”

   

 

그렇게도 눈에 띄던 절대로. 이 슬로건[아니 이 한 단어]에 머리를 맞고 다른 책 다 제쳐놓은 채 <숙명> <숙명>에 의한 <숙명>을 위한 나의 의지로 결말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앞에서 말했듯 결말은 예측불가였으며[내 경우에 의하자면] 20년 가까이 결말이 먹히고 있는 걸 보면 이 슬로건이 그저 광고를 위한 헛소리는 아니었던 셈이다. 여러분의 흥미를 더 돋우기 위한 작가의 인터뷰 한 부분을 소개한다.

 

 

특히 이번 작품에서 가장 마음에 든 부분은 마지막 한 행에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그 부분을 미리 읽지 마십시오. 이 작품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의외성인 마지막 한 행에 얼마나 비중을 둘 것인지 면밀하게 계산하고 나서, 등장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의 과거를 적어나갔습니다. 집필기간은 두 달 정도였는데, 이 연표를 만드는 데는 석 달 정도 걸렸습니다.

 

   

  이 소설을 읽고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를 처음 알게 되었다. 나야 이 소설을 통해 처음 알았지만, 건너편 일본에서는 이 작가의 책이 난리도 아니라더라. 참고로 우리나라에서 영화로 제작된 <백야행>의 원작이 이 작가의 <백야행>이라는 책이라더라. 나는 이 작가의 인터뷰를 보고 그에게 참으로 마음에 드는 구석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 작가의 책이라면 믿고 볼 수 있겠구나 생각도 했다. 그건 바로 그의 창작에 대한 생각 때문이다.

 

 

 

최근 미스터리 소설을 보면 범인은 누구일까, 어떤 트릭을 썼을까 하는 수수께끼만으로 끝납니다. 좀 더 단순한 것으로 수수께끼를 설정할 수는 없을까, 다른 형태의 의외성을 창조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초기 작품들처럼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트릭이 있고, 범인은 이 사람이다.’ 하는 내용은 식상합니다. 이런 식이라면 아무리 많은 작품을 써도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 시행착오를 겪는 단계지만, 미스터리가 아니라도 좋으니 그러한 작품은 피해가고 싶었습니다.

 

 

 

보이는가? 남들 하는 건 하지 않겠다는 저 의지. 식상한 건 피하겠다는 저 신념. 많은 소설이 쏟아지는 이 시점에서, 그래서 결론이 비슷비슷하고 이에 실망한 독자들이 어떤 소설을 읽어야 할까 고민하는 이 시점에서, 이 작가의 작품은 희소성을 띈다. 나도 스릴러, 추리물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와 관련한 많은 영화와 책들을 읽어왔다. 그러나 죄다 비슷비슷하다. 결말이야 다르겠지만,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트릭이 있고, 범인은 이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틀은 거의 변함이 없다. 허나 <숙명>은 다르다. 살인사건이 발생했고 범인이 누구인지 찾아야 하는 기본적인 이야기[추리소설이라면 갖춰야 하는 이야기의 틀] 외에도 숨겨진 다른 이야기가 존재한다. 아니 숨겨진 다른 이야기가 오히려 메인스토리라고 말할 수 있겠다. 범인을 좁혀나가는 반전도 있지만, 그 외에 숨겨진 이야기에서의 반전에 우리는 더 큰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본격 추리로서의 의외성을 제대로 갖추고 있으면서 다른 방식의 의외성까지 추구하고 있다 일본 문학평론가의 말이 딱 맞다.

 

 

  숙명? 태어났을 때부터 나의 삶이 정했다는 이 운명론적인 생각? 많은 사람이 운명을 사랑에서 느낀다고 한다. ‘이 사랑 운명이야’, ‘너와 내가 만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우연을 거쳐 온 것이야난 운명적인 사랑을 만난 적이 없기에 모르겠다. 아니다. 생각해보면 운명은 자신이 누군가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그 진실성에서 나오는지 모르겠다. 서로가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서로의 공통점, 여러 우연을 나열하면서 자의적으로 이건 운명이라고 말하는 여러 상황들, 여기에는 운명으로까지 치부하면서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랑, 그들의 사랑을 좀 더 아름답게 미화하려는 그들의 절박함이 숨겨져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운명이란 없고, 사람의 의지만이 존재한다는 것인데. 허나 이 의지가 별로 오래가지 못한다는 사실은 참 함정이다. 난 운명, 숙명 이런 건 잘 모르겠다. 허나 있다면 더럽게 슬플 것 같다. 나는 이렇게 내가 하고 싶은 걸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데, 운명이 정해져 있다면 지금 하는 이 짓들이 다 무용지물이라는 뜻이니까. 그래서 지금은 없다고 그냥 생각하련다. 내 미래 어쩌면 사랑까지도 내가 만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련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걸 운명으로 치부해버리는 지독한 회의주의에 빠질 수 있으니까.

 

 

ps. <제노사이드>700pg에 이르기 때문에, <숙명>400pg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역시 책도 읽어야 느는가 보다. 오늘 팔굽혀펴기를 100개 할 예정이었는데 120개로 늘려야겠다. 근육 붙는 소리가 들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