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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의 감상

우리는 사형 앞에서 정직할 수 있을까? - 알베르 카뮈, 이방인




   <이방인>은 두 번 읽었지만, 여전히 감이 잡히지 않는 소설이다. 나는 무언가를 읽으면 리뷰를 남긴다. 그리고 내가 느낀 것에 대해서 솔직하게 표현하고자 노력한다. 허나 <이방인>처럼 리뷰를 쓰기가 어려운 적은 처음인 것 같다. 도대체 뭘 써야 할지 감이 오질 않는다.


 

  두 번째로 읽은 책은 민음사에서 번역된 책이다. 민음사의 <이방인>에는 소설 외에도 작가의 편지, 미국판 서문이 실려 있어 이방인을 쓴 카뮈의 생각을 조금은 엿볼 수 있었다. 그 서문과 편지에 도움을 받아 부실하게나마 내가 느낀바(사실은 알게 된바)를 남겨본다.

 

 

  소설 <이방인>의 제목이기도 한 이방인은 무엇을 뜻할까? ‘이방인이란 낯선 지역에서 온 사람, 낯선 사람쯤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허나 작가가 이렇게 제목으로 정한 데에는 사전적 의미 외에 숨은 의도가 있어서가 아닐까? (많은 소설이 그렇겠지만) ‘밀란 쿤데라<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제목이 작가의 의도를 반영했듯이 이방인이란 제목은 책의 핵심과 연결된다. 그걸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와 뫼르소가 연루된 사건을 알아야 한다.


 

  선박중개인으로 일하던 뫼르소는 아랍인을 죽이게 된다. (믿을 수 없겠지만, 나 또한 그 살인의 이유를 엄청나게 고민했지만) 뫼르소는 자기가 아랍인을 죽인 이유는 순전히 태양 때문이라고 한다. 허나 그의 말은 상관도 없이(또 그는 철저히 배제된 채) 아랍인 살인 사건은 검사와 변호사에 의해 새롭게 재구성된다.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 때 무관심했다는 것, 엄마의 얼굴을 보려 하지 않았다는 것, 장례식장에서 담배를 피웠다는 것, 생전에 엄마를 양로원에 맡겼다는 것, 엄마의 장례식 이후 여자와 해수욕을 즐기고 즐거운 영화를 보고 섹스를 즐겼다는 것 등. 그의 살인행위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던 예전 일들이 그의 범죄행위의 동기가 된다. 검사는 이러한 동기를 들어 뫼르소를 사형시키기 위한 가설을 만들고 그 가설이 진짜인 마냥 배심원과 판사를 설득한다. 물론 변호사는 그의 심리상태를 들어 정상참작을 요구한다.


 

  뫼르소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범죄자라면 당연히 변호사의 말을 잘 듣고 어떻게든 형량을 줄이기 위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충격으로 정상생활이 불가했으며, 칼로 위협하는 아랍인에 대항하다가 정당방위로 죽이게 되었습니다.’ 살고 싶다면 이렇게 나와야 한다. 어느 정도의 거짓말과 과장은 이 과정에서 필요하다. 허나 뫼르소는 이를 단호히 거부한다. 거짓말하기를 거부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사형을 받아들인다.



  여러분도 이쯤 되면 뫼르소가 궁금하리라 생각된다. 살인 사건을 저지른 주제에 무슨 배짱으로 저러지?, 태양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면 미친x 아니야?, 어머니의 장례식이 끝나고 여자와 섹스를 해? 불효자식 등. 이렇게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대면 뫼르소는 한없이 나쁜 인간이 된다. 살인자이고 불효자이다. 카뮈는 ‘<이방인>에 대한 편지라는 독일 독자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밝힌다.

 

 

어떤 사람들은 이 작품에서 새로운 유형의 배덕자를 발견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건 완전히 틀린 생각입니다. 여기서 정면으로 공격받고 있는 대상은 윤리가 아니라 재판의 세계입니다. 재판의 세계란 부르주아이기도 하고 나치이기도 하고 공산주의이기도 합니다. 만약 당신이 이 책을 이러한 측면에서 해석해 본다면 거기서 어떤 정식성의 모럴을, 그리고 이 세상을 사는 기쁨에 대한 해학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찬양을 발견할 것입니다.”


 

  작가는 뫼르소를 윤리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말 것을 당부한다. 윤리는 이 소설의 초점이 아닌 셈이다. 작가는 덧붙여서 공격의 대상이 재판이라고 말한다. 재판이 공격의 대상이라고? 다시 한 번 재판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재판에서 검사와 판사와 변호사는 피고, 즉 뫼르소를 배제한 채 그의 죄를 논한다. 검사는 가정 그 자체인 가설로 뫼르소의 죄를 확정하고, 변호사는 뫼르소가 말한 진실은 무시한 채(그가 말한 진실은 재판에서 무익하니까), 그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그의 죄를 변호한다. 수사학의 세계에서는 누가 더 유창한가?’, ‘누가 더 설득력 있는가?’를 진실의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던가? 판사는 두 거짓 사이에서 어떤 거짓이 더 믿음직한지를, 더 설득력 있는지를 판단한다. 재판. 진실이 배제된 재판. 이는 카뮈가 말하는 유희, 부조리의 세계이며, 뫼르소가 귀찮은 일쯤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뫼르소는 이 유희의 참석을 거부한다. 그에게 주어진 역할 피고. 피고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척해야하는 자리인데, 그는 그 역할을 거부한다. 사회는 요구한다. 재판이라는 시스템에 맞춰 거짓말을 하고 뉘우치는 척을 하라고! 사회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어찌 너는 울지 않을 수가 있고, 어떻게 섹스를 할 수 있느냐고 나무란다. 뫼르소는 생각한다. 자기가 생각할 때는 자신의 살인 행위가 예전 자신의 행위들(울지 않은 것, 해수욕, 섹스 등)과 연결되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고.


 

재판은 '관습'을 상징하는 하나의 예로 볼 수 있겠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개인은 울 수도 울지 않을 수도 있다. 꼭 울어야 한다는 것은 사회적 관습이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는 울어야한다는 사회적 관습처럼 사회에는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관습이 존재하며(사람들은 침묵으로 이를 수긍한다.) 그 관습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이상한 사람이 된다. 거짓말을 거부하고, 사회의 판에 박힌 관습에 거부하는 뫼르소는 이렇게 이방인이 되는 것이다.


 

  카뮈는 그의 미국판 서문에서 뫼르소를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인물을 통해서, 우리들의 분수에 맞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그리스도를 그려 보려고 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모든 원죄를 업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 뫼르소는 부조리를 강요하는 세상에 결연한 자세로 맞서 사형당한다. 어째 겹쳐 보이지 않는가?



  부조리관습을 비웃는 카뮈의 한 마디를 소개하며 포스팅을 마친다.


 



우리 사회에서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

- 알베르 카뮈-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hongi52?Redirect=Log&logNo=130085311093